테오피르 고티에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가
피에르 쥘 테오필 고티에는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저널리스트이자 미술 및 문학 평론가였다. 낭만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이긴 하지만, 고티에의 작품은 분류하기 어려우며 파르나스주의, 상징주의, 타락주의, 모더니즘과 같은 후속 문학 전통들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참고 자료로 남아 있다. 그는 발자크, 보들레르, 공쿠르 형제, 플로베르에서부터 파운드, 엘리엇, 제임스, 프루스트, 와일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작가들에게 널리 존경받았다. 고티에는 1811년 8월 30일 프랑스 남서부 오트피레네 주의 주도 타르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다소 교양 있는 하급 정부 관리인 장피에르 고티에였고, 어머니는 앙투아네트아델라이드 코카르였다. 가족은 1814년 파리로 이사하여 오래된 마레 지구에 정착했다. 고티에의 교육은 파리의 명문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졸업생으로는 볼테르, 샤를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사드 후작 등이 있음)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는 병으로 인해 3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샤를마뉴 고등학교(졸업생으로는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가 있음)에서 나머지 학업을 마쳤지만, 고티에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으며, 아버지는 그가 18세까지 라틴어 학자가 되도록 촉구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고티에는 제라르 드 네르발과 친구가 되었고, 두 사람은 평생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고티에는 바로 이 네르발을 통해 당시 이미 잘 알려진 연극작가이자 『에르나니』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를 만났다. 위고는 고티에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화가를 꿈꾸던 고티에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은 것으로 평가된다. 전설적인 『에르나니』 초연 무대에서 고티에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더블렛을 입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1830년 혁명 이후, 고티에의 가족은 어려움을 겪어 파리 외곽으로 이사해야 했다. 자신의 독립과 자유를 시험해 보기로 결심한 고티에는 파리의 두아이엔네 지역에 있는 친구 집에 머물며 꽤 즐거운 보헤미안 생활을 했다. 1830년 말 무렵, 고티에(Gautier)는 쥐앙 뒤 쎙뉘르(Jehan Du Seigneur)의 작업실에서 모임을 가졌던 예술가 그룹인 ‘르 페티 세나클(Le Petit Cénacle, 작은 다락방)’의 모임에 자주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 그룹은 위고(Hugo)의 세나클(Cénacle)보다 더욱 무책임한 성향을 지녔다. 그 멤버들에는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Alexandre Dumas, père), 페트뤼스 보렐(Petrus Borel), 알퐁스 브로(Alphonse Brot), 조제프 부샤르디(Joseph Bouchardy), 필로테 오네디(Philothée O’Neddy, 본명은 테오필 동데이 Théophile Dondey) 등이 있었다. 르 페티 세나클은 곧 사치와 기행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동시에 사회로부터 벗어난 독특한 피난처로도 알려졌다. 고티에는 1826년 이른 시기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의 인생 대부분을 여러 잡지, 주로 『라 프레스(La Presse)』의 기고가로 보냈다. 이 일은 그에게 해외 여행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상류사회와 예술계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티에는 평생 동안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이집트, 알제리를 포함해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이러한 수많은 여행은 그의 저작들, 특히 『스페인 여행기(Voyage en Espagne, 1843년)』, 『러시아 미술의 보물(Trésors d’Art de la Russie, 1858년)』, 『러시아 여행기(Voyage en Russie, 1867년)』 등에 영감을 주었다. 고티에의 여행 문학은 19세기 최고 수준의 작품 중 하나로 널리 평가받고 있으며, 종종 개인적인 문체로 쓰여져 고티에 자신의 예술 및 문화에 대한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고티에(Gautier)는 낭만주의 발레 시대의 유명한 '아방도네(abandonné, 어떤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로,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지젤』이며, 이 작품의 초연에서 주역을 맡은 발레리나 카롤라 그리시(Carlotta Grisi)는 그의 인생 최대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는 그녀의 여동생이자 가수인 에르네스티나(Ernestina)와 결혼했다. 1848년 혁명에 몰두한 고티에는 1848년 9개월 동안 거의 백 편의 기사를 썼는데, 이는 네 권의 큰 책과 맞먹는 분량이었다. 그는 에세이 『미래의 공화국(La République de l'avenir)』에서 새로운 공화국의 등장과 개인적 자유의 진보를 찬양했다. 당시 위고,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알퐁스 드 라마르틴, 알프레드 드 비니, 알프레드 드 뮈세와 같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문단에서 더 이상 활발히 활동하지 않던 시기였기에, 고티에에게는 인생에서 특히 두드러진 시기였다. 1851년부터 1856년까지 『파리 평론(Revue de Paris)』의 편집장을 맡아 그의 명망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시기에 고티에는 『프레스(La Presse)』를 떠나 『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셀(Le Moniteur universel)』의 기자가 되었으나, 정기적인 언론 활동의 부담을 매우 견디기 힘들고 “굴욕적”이라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티에는 1856년 영향력 있는 잡지 『라르티스트(L’Artiste)』의 편집장을 맡았다. 바로 이 잡지를 통해 그는 수많은 사설을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라는 교리를 널리 알렸다. 1860년대는 고티에에게 확고한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시기였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에 세 번(1867년, 1868년, 1869년)이나 탈락했지만,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인 샤를-오귀스탱 생트뵈브가 1863년 고티에의 출판된 모든 저작을 검토하는 세 편의 주요 기사를 바치며 이 시인에게 공식적인 승인을 부여했다. 1865년, 고티에는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자 보나파르트의 조카딸인 마틸드 보나파르트 공주의 저명한 살롱에 초대되었다. 1868년 공주는 고티에에게 도서관 사서라는 무위직을 제안했는데, 이 직책 덕분에 그는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62년에 국립미술협회(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주변에는 유진 들라크루아, 피에르 퓨비 드 샤반느, 에두아르 마네, 알베르-에르네스트 카리에-벨뢰즈, 귀스타브 도레 등 중요한 화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고티에(가우티에)는 프로이센군이 수도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침공 기간과 파리 코뮌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 머물렀으며, 결국 1872년 10월 23일 오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고티에는 61세였다. 그는 파리의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