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루이 지로데트리온

1767 - 1824 French

앙루이 지로데트리온

정밀한 관능적 낭만주의 양식

앙루 지로데 드 루시-트리오송(또는 드 루시)은 앙루 지로데-트리오송 또는 간단히 지로데로도 알려진 프랑스 화가로,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였다. 그는 작품에 관능적 요소를 포함시켜 초기 낭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지로데는 정밀하고 명확한 스타일과 나폴레옹 가문 구성원들을 그린 그림으로 기억된다. 지로데는 몽타르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젊은 성인일 때 모두 사망했다. 그의 유산과 교육은 보호자이자 저명한 의사였던 베누아=프랑수아 트리오손(Benoît-François Trioson)의 손에 맡겨졌는데, 그는 '메담의 의사'로 불렸으며 나중에 지로데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지로데는 1812년에 트리오손 성을 사용했다. 학교에서는 처음에 건축을 공부하고 군인 생활을 추구했으나, 루퀸(Luquin)이라는 스승 아래서 회화로 전향한 후 자크-루이 다비드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22세의 나이에 그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라는 작품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1789년부터 1793년까지 이탈리아에 거주했으며, 로마 체류 중 '알타케르세스의 선물을 거부하는 히포크라테스'와 '잠자는 엔두미온'(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제작했는데, 후자는 1793년 살롱전에서 큰 찬사를 받아 프랑스 화파의 주요 화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지로데는 나폴레옹 가문의 일원을 포함한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1806년, 그는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과 경쟁하여 '홍수 장면'(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전시했고, 10년상을 수상했다. 1808년에는 '빈의 항복'과 '아타라 무덤 앞'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타라'가 1801년에 처음 출판된 주제 선택의 적절함과 지로데 특유의 극적 스타일에서 현저히 벗어난 점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그는 '카이로 봉기'(1810년)에서 다시 극적인 스타일로 회귀했다. 지로데는 회화 아카데미와 프랑스 연구소의 회원이었으며, 성 미카엘 훈장의 기사이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장교였다. 그의 제자로는 자크상트 오브리-르콩트, 아우구스틴 판덴 베르헤 주니어, 프랑수아 에두아르 베르탱, 앙젤리크 부이예, 알렉상드르-마리 콜랭, 마리-필리프 쿠통 드 라 쿠페리, 앙리 데카이즈느, 폴-에밀 데슈퇴쉬, 아실 데베리아, 오귀스트 데베리아, 사비니앙 에드뮈 뒤부르잘, 조제프 페르디낭 랑크레논, 안토닌 마리에 모인, 장자크 프랑수아 모난테위, 앙리 보나벤투르 모니에, 로자리 르노단, 요한 하인리히 리히터, 프랑수아 에드뮈 리코아,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플뢰리와 필립 야크 반 브레 등이 있다. 그가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힘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야간 작업 습관과 기타 과잉 행동이 그의 체력을 약화시켰다. 1812년 살롱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머리'만 전시했으며, 1819년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전시는 더욱 뚜렷한 쇠퇴를 보였다. 1824년, 카트레노와 본샹의 초상화를 제작한 해에 지로데는 12월 9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사후 유물 경매에서 그의 일부 그림은 엄청난 가격에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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