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란프란코

1582 - 1647 Italian

조반니 란프란코

바로크 천장 환상화 대가

조반니 란프란코는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였다. 조반니 가스파레 란프란코는 파르마에서 태어나 스테파노와 코르넬리아 란프란키의 셋째 아들로, 오라치오 스코티 백작의 저택에서 시동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안니발레 카라치의 형제인 볼로냐 출신 예술가 아고스티노 카라치에게 도제 수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파르마 출신인 시스토 바달로키오와 함께 지역의 파르네세 궁전에서 작업했다. 1602년 아고스티노가 사망하자 두 젊은 예술가는 로마에 있던 안니발레의 크고 저명한 공방으로 옮겨갔는데, 당시 이 공방은 파르네세 궁전 갤러리 천장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란프란코는 《폴리페모스와 갈라테이아》 패널(도리아 갤러리에 복제본 소장)과 방 안의 일부 소품 작품 제작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란프란코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카라치 공방의 일원이었으나, 귀도 레니 및 프란체스코 알바니와 함께 산 자코모 델리 스파뇰리 성당의 에레라(산 디에고)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1602–1607). 그는 또한 산 그레고리오 마뇨 성당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내 파올리나 경당의 프레스코 장식 작업에도 참여했다. 1605년이 되자 란프란코는 독립적인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그는 산타 마리아 델로라치오네 에 모르테 교회에 인접해 있던 줄리아 가의 낮은 건물이었던 파르네세 소궁전(일명 카지노 델라 모르테)의 은수자 소실에 그림을 기증했다. 이 소실은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추기경이 자신의 궁전과 정원 옆에 지었으나, 앞서 언급한 교회의 건설을 위해 1734년 철거되었다. 도메니키노, 지롤라모 풀로네, 파울 브릴, 란프란코가 그린 유화와 프레스코화 중 일부는 새 교회에 보존되어 있다. 다른 작품들 중에서 란프란코는 이 연작에 독특한 스타일의 '막달레나의 승천'을 기여했다. 1609년 안니발레 카라치가 사망하고 에밀리아 화파가 일시적으로 인기를 잃자, 란프란코는 고향 파르마로 돌아가 2년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바르톨로메오 스케도니를 만나 오니산티 교회의 제단화를 그렸다. 란프란코는 또한 오르비에토, 발레라노, 레오네사, 페르모에서도 회화와 제단화를 제작했다. 1612년 로마로 돌아온 후, 란프란코는 레니, 알바니, 도메니키노를 비롯한 다른 카라치의 제자 및 조수들과 로마의 후원 확보를 놓고 경쟁했다. 그러나 레니는 곧 나폴리로, 이어 볼로냐로 떠났다. 그 후 수십 년간, 1620년대에 걸쳐 란프란코와 도메니키노는 로마에서 주요 프레스코화 제작 의뢰를 두고 치열한 라이벌전을 벌였다. 이 경쟁의 강도는 란프란코가 공개적으로 제기한 비난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그는 현재 바티칸에 소장된 도메니키노의 회화 《성 예로니모의 고해》에서 아고스티노 카라치의 작품이 표절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이 지적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메니키노와 달리 란프란코는 스타일 면에서 상당히 절충적이었으나, 17세기 초에 유행하기 시작한 천장화에 적합한 환상적이고 연극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아고스티노 및 안니발레의 사촌인 루도비코 카라치의 후기 작품에서 비롯된 영향이 감지되며, 카라바조의 영향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예를 들어 1611년 피아첸차에서 제작한 제단화 <성 루카의 영감> 등). 다만 카라바조가 란프란코의 스타일에 미친 중요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동향 선배이자 16세기 화가인 안토니오 코레조의 양식을 흡수하고 변용했는데, 1608년 이전에 클레멘테 산네시 후작과 그의 형제인 야코포 추기경을 위해 그린 <목동들의 경배>가 그 예이다. 1610년대에 란프란코의 공방은 매우 활발해져 마테이 궁전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리고 산타고스티노 성당의 부온조반니 예배당(1616년)을 장식했는데, 여기에는 코레조 풍의 <성모 승천>과 함께 이젤 회화도 포함되어 있다. 산 카를로 아이 카티나리 성당에 있는 그의 <수태 고지>(1615년)는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된다. 곧 란프란코는 교황 바오로 5세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가 되었다. 그는 코스타구티 궁전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보르게세 빌라에는 쿼드라투라 기법의 대형 천장 벽화 <올림포스의 신들>, 일명 <신들의 회의>를 제작했다. 이듬해 란프란코는 아고스티노 타시, 카를로 사라체니와 함께 퀴리날레 궁전의 코라치에리실과 살라 레지아를 장식했다. 그의 정통적인 작품 <성전 봉헌>은 햇살이 내리쬐는 카라치 풍의 양식을 보여준다. 1622년에는 마르게리타가 생을 보내고 선종한 코르토나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성당을 위한 제단화로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게리타의 황홀경>(피렌체 피티궁 플라티나 미술관 소장)을 그렸다. 이 그림은 베르니니의 유명한 조각품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 속 자세에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623년부터 1624년까지 그는 로마의 산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 성당에 있는 사케티 예배당을 장식했다. 바오로 5세의 후임인 그레고리오 15세는 구에르치노와 도메니키노의 작품을 선호했지만, 란프란코는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의 십자가 경당 장식 의뢰를 따냈다. 그러나 란프란코의 최고 걸작이자 1620년대 후반 가장 중요한 교회 프레스코 장식 중 하나는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 대성당 돔에 그린 '성모 승천' 프레스코화였다. 1627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투시법을 사용하여 수많은 인물이 빽빽하게 배치되었으며, 밝은 황금빛 색채와 역동성이 돋보이는 바로크 회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란프란코는 코레조가 파르마 대성당에 남긴 선구적인 장식의 영향을 받았다. 우르바노 8세는 그에게 대형 프레스코화 <물 위를 걷는 성 베드로>(1628년, 현재는 단편적으로 남아 있음)를 의뢰했으며, 란프란코는 이 작품으로 그리스도 기사단의 기사 칭호를 얻었다. 1631년 란프란코는 로마의 예술가 길드인 성 루카 아카데미의 원장(Principe)으로 임명되었다.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있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기념비 위쪽에도 조반니 란프란코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1634년부터 1646년까지, 란프란코는 1634년부터 1637년까지 나폴리의 제수 누오보 교회의 돔과 펜던티브 장식을 시작했다. 1637년부터 1638년까지 그는 산 마르티노 수도원의 신랑과 성가대석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어 1638년부터 1646년까지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의 장식과 나폴리 대성당 내 산 젠나로 예배당의 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17세기 후반 나폴리의 그랜드 매너 화가들인 프레티, 조르다노, 솔리메나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1647년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그곳에서의 마지막 작품은 산 카를로 아이 카티나리 성당의 후진이었다. 란프랑코는 카라치의 다재다능하고 절충적인 제자로, 주로 안니발레의 웅장한 양식을 모방하며 종종 절제된 화풍을 보였던 도메니키노와 대조적으로 극적인 감각으로 그들의 전통을 이어갔다. 란프랑코는 새로운 양식을 탐구하고 전통을 연결했으며, 테네브리즘과 색채주의 팔레트를 사용하여 매너리즘과 바로크 양식 모두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제자 중에는 자친토 브란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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